전시장 벽면에 걸린 천진난만한 아이들
미술관 조명 아래 홀로 빛나듯 걸려 있던 이중섭의 어린이 그림들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들의 '눈빛'이었습니다.
정면을 향한 시선: : 화면 속 벌거벗은 아이들은 서로 어울려 놀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늘 관람객인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슬픔을 감싼 동심: 마치 "나 여기 있어요, 외롭지 않아요"라고 말하듯 정면을 향한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첫아이를 전염병으로 잃고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채 홀로 남겨졌던 화가의 절절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린 것은 어떠한 세속적 가치나 오염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인간 본연의 상태, 즉 전쟁의 상처가 닿지 않는 순결함을 표현한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동자>와 물고기·게가 어우러진 유토피아
이중섭의 그림에는 아이들 곁에 늘 물고기나 게, 복숭아 같은 자연물이 친구처럼 함께 등장합니다.
사해동포주의와 공존: 서귀포 피란 시절 굶주림 속에서도 아이들과 물고기, 게가 한데 뒤엉켜 춤추듯 놀고 있는 도상들을 보노라면, 인간과 자연, 생명과 비생명이 구별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고구려 벽화의 향수: 복숭아나무 아래서 노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고구려 고분 벽화나 조선시대 민화 속 신비로운 도연(桃源)을 연상시킵니다.이 세상이 비록 총칼과 가난으로 멍들었을지라도, 아이들이 웃으며 뛰노는 그곳만큼은 화가가 가닿고 싶어 했던 영원한 이상향, 즉 유토피아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들과 끈> :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찬가
제가 감상하며 가장 오래 발길을 멈췄던 작품 중 하나는 여러 명의 소년들이 가늘고 긴 선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아이들과 끈>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유대: 아이들의 신체 일부와 손발은 가느다란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환과 결속: 이 끈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물리적으로는 태평양 건너 일본에 떨어져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줄이자 사랑의 매개체로 다가왔습니다.
삭막한 피란 가도 위에서 오직 편지와 은박지에 새긴 철필 자국으로 가족을 만나고자 했던 이중섭에게, 이 끈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자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인연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전시장을 나와 문득 돌아본 이중섭의 그림 속 아이들은 비록 가난하고 외로웠던 천재 화가의 환상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순수한 사랑과 인연이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되묻고 있었습니다.
그림 읽어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