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닭 그림] 붉은 벼슬 끝에 꽃피운 대립과 화해, 그리고 절절한 붉은 사랑
.[이중섭의 닭 그림] 붉은 벼슬 끝에 꽃피운 대립과 화해, 그리고 절절한 붉은 사랑우리가 미술관이나 화집에서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접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단연 억세고 강렬한 선으로 표현된 ‘소’일 것입니다. 땅을 딛고 포효하는 소의 모습은 잔혹했던 시대의 고통과 한국인의 한(恨), 그리고 작가의 강인한 예술혼을 대변합니다.하지만 이중섭의 붓 끝에서 ‘소’ 못지않게 자주, 그리고 지독하리만큼 뜨겁게 변주된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닭’입니다.화려하고 격렬한 깃털의 움직임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도, 이내 서로의 몸을 부비며 다정하게 춤을 추는 닭들. 이중섭에게 닭은 단순한 미물이나 농가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가난과 이별이 가져온 극심한 내면의 갈등, 그리고 바다 건너 아내를 향한 시들지 않는 연가(戀歌)를 담아낸 가장 정직한 마음의 거울이었습니다.
1. 닭이라는 소재: 대립, 화해,그리고 부부간의 애정 심리이중섭은 6·25 전쟁 직후 제주도 서귀포에서의 피란 시절을 지나, 1952년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홀로 남겨진 시기에 닭을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닭 그림 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의 심리적 궤적을 그립니다.
첫째, 현실과의 치열한 맞대결과 내면의 고통 (대립)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하루 한 끼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이중섭의 내면은 늘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번민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닭들은 벼슬을 붉게 세우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로를 겨누며 치열하게 싸웁니다. 이는 전쟁과 이별이라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화가의 분노이자,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둘째, 갈등을 녹여내는 완벽한 일체감 (화해)하지만 이중섭의 붓은 대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날카롭게 서 있던 선들은 어느덧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뀌며 두 마리의 닭을 하나로 묶어냅니다. 붉은 벼슬과 푸른 깃털이 어우러지며 부리를 맞대고, 날개를 넓게 펼쳐 서로를 감싸 안습니다. 치열하게 대립하던 생명의 에너지가 서로를 향한 깊은 이해와 화해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셋째, 아내 이남덕을 향한 숭고한 사랑 (애정)이중섭의 닭 그림에서 암탉과 수탉은 곧 이중섭 자신과 아내 마사코입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직접 살을 맞대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그는 화폭 위에서 두 닭을 끊임없이 결합시켰습니다. 닭 주변에 아이들이나 귤나무, 물고기가 함께 등장할 때면, 그 그림은 단순한 동물화가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웃음짓는 유토피아적인 가족 찬가로 변모합니다.
2. 주요 작품 해설: <투계>에서 <부부>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
① <투계(싸움닭)>: 핏빛 벼슬에 담긴 예술적 격정화면 가득 두 마리의 닭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들이받을 듯 깃털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강렬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 그리고 이중섭 특유의 억세고 기운찬 검은 필선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이 작품 속 싸움은 단순한 동물들의 미물 싸움이 아닙니다. 이별의 아픔에서 오는 절망, 화가로서 선뜻 살아내기 힘든 야속한 시대와의 한판 승부입니다. 발톱을 세우고 공중에 떠 있는 닭의 모습에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으려 했던 거장의 뜨거운 예술적 투혼이 서려 있습니다.
② <부부(두 닭)>: 춤추듯 어우러지는 영혼의 결합<투계>에서 느껴지던 팽팽한 긴장감은 <부부>에 이르러 거짓말처럼 따스한 애정으로 녹아내립니다.암탉과 수탉이 부리를 꼭 맞대고 서로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마치 열정적인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유화 물감을 얇게 바르고 선을 긁어내듯 표현한 기법은 두 닭의 유대감을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 줍니다. 현실에서는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술 속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완벽한 부부의 하나 됨을 표현한 명작입니다.
3. 대표작 해설: <연지 찍은 닭> - 붉은 연지 끝에 피어난 사랑스런 해학이중섭의 닭 그림 시리즈 중에서도 독보적인 서정성과 아련함을 자랑하는 작품이 바로 <연지 찍은 닭>입니다.작품을 유심히 살펴보면 전통 혼례 때 신부가 볼에 바르는 '연지곤지'처럼, 닭의 얼굴과 벼슬 주변에 발그레한 붉은 물감이 다정하게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수줍은 신부를 닮은 암탉: 화가는 암탉의 볼과 벼슬에 붉은 연지 빛깔을 살포시 올려놓음으로써, 마치 갓 시집오는 수줍은 신부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굶주림과 병마, 생이별이라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아내 이남덕을 처음 만나 가슴 떨렸던 그 시절의 설렘을 잃지 않으려는 화가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동양적 필선: <투계>의 거칠고 날카로운 선과 달리, <연지 찍은 닭>의 필선은 매우 부드럽고 다정합니다. 마치 아이들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경쾌하고 천진난만한 기운이 화면 전체를 감쌉니다.
비극을 이겨내는 해학: 슬픔을 슬픔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한국적인 해학과 밝은 정조로 반전시키는 이중섭 특유의 예술성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아내에게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화가의 아기자기한 애정이 붉은 연지 한 점에 그대로 condensations되어 있습니다.
해성아트베이에서 만난 이중섭,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난 아리함 가끔 해성아트베이에 들를 때면, 미술관 공간이 주는 특유의 고즈넉함 속에서 이중섭 화백의 작품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특히 미술관 관장님이신 김종신 선생님과 그의 아내분 곁에서 이중섭의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면, 그 감동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집니다.
두 분의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통해 그림 구석구석에 숨겨진 절절한 사랑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뭉클함과 아련한 아리함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화려한 전시장의 조명 아래 걸린 그림이지만, 김종신 관장님 부부의 설명을 듣다 보면 그것은 단순한 미술품을 넘어섭니다. 한 남자가 바다 건너에 두고 온 아내를 얼마나 미치도록 그리워했는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얼마나 되찾고 싶어 했는지가 피부에 와닿듯 느껴집니다.
치열하게 싸우는 <투계>를 보며 시대의 아픔에 함께 눈물짓고, 볼에 다정하게 연지를 바른 <연지 찍은 닭>을 보며 그 가슴 아픈 사랑스러움에 먹먹해집니다. 캔버스 위에서 붉게 타오르던 닭의 벼슬은, 어쩌면 화가가 자신의 피를 깎아 만들어낸 그리움의 결정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장님 부부의 애정 어린 설명 덕분에 저는 이중섭이라는 거장의 예술 뒤에 숨려진 '한 인간의 가장 정직하고 부드러운 순정'을 온전히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시대를 뛰어넘는 따뜻한 울림오늘날 우리는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세상 누구와도 순식간에 얼굴을 보고 음성을 나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음과 마음이 깊게 닿는 진정한 울림은 점차 희미해져 가는 듯합니다.이러한 시대에 이중섭의 닭 그림 시리즈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특별합니다. 물감 한 뼘, 종이 한 장이 아쉬웠던 참혹한 환경 속에서도 붓 끝에 실어 보낸 그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빛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비록 이중섭 화백은 가난과 외로움 속에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닭들의 뜨거운 날개짓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당신은 지금 무엇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다음번에 이중섭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거친 황소의 울부짖음 뒤에 숨겨진 그의 다정한 닭 그림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세요. 그곳에는 바다를 건너 사랑하는 이에게 닿고 싶었던 한 남자의 숭고하고 아련한 전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림 읽어주는 사람